이미지 출처 https://www.aweinautism.org/about-us/
한편 루의 펜싱 클럽 친구인 돈(Don)은 루를 시기한 나머지(펜싱 클럽의 한 여성이 루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질투해요) 루를 스토킹하면서 일상을 서서히 망가뜨리고 마침내는 자동차 폭탄 테러를 모의합니다. 새로 온 상사 크렌쇼와 마찬가지로, 돈은 루에게 노골적으로 "병*" "동물원에나 처박혀 지내야 할 존재"라고 욕하고, 약자들에게 쏟아붓는 온갖 사회 지원 때문에 자기 같은 인재가 밑바닥 일을 하고 사회가 불경기로 빠져든다고 말합니다. (이 말, 왜 이렇게 익숙하죠?)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수술을 받을지 말지가 더욱 급박한 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돈이 범인이라는 걸 애시당초부터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는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돈은 자신의 친구이고, 친구란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런 식으로 자폐인이 사고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소위 정상인들에게 분명히 보이는 사건들이 루에게는 미스터리일 때가 많으며, 정상인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루에게는 너무나 명백히 보이는 일상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은 채로 뚝뚝 끊어지는 듯한 서술방식이 낯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루의 시각에 서서히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때 같을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내요. 괜찮아요. 잘 자요, 부탁합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아뇨, 사양할게요, 당장은 아니에요. 교통 법규를 지킨다. 규칙을 따른다. 아파트에 평범한 가구를 놓고, 내 별난 음악은 아주 조용히 틀거나 헤드폰으로 듣는다. 그래도 부족하다. 이렇게도 안간힘을 쓰는데도, 진짜 사람들은 내가 변화하기를, 그들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내 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63쪽)
책의 제목은 <어둠의 속도>였죠. 많은 사람들은 밝은 상태, 빛을 기본값으로 봅니다. 어둠이란 그저 빛이 없는 상태인 거죠. 하지만 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이란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다, 어쩌면 어둠은 빛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어둠은 빛보다 항상 먼저 있다고 말이죠. 이 말은 엘리자베스 문 작가의 자폐인 아들이 했던 질문에서 왔다고 해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자폐'와 '정상'은 전혀 동떨어진 대척점이 아니라 스펙트럼 상에 있는 두 점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자폐의 특성을 정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을 갖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자폐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술이 좋았어요.
자, 그래서 루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국 루는 수술을 받는 선택을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위험을 감수하기를, 새로운 친구를 찾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나온 루는 동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술을 끝까지 받지 않은 동료도 있어요.
에필로그에서 루는 여전히 밖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죠. 대학교육을 받고 천문학자가 된 루는 빛을 쫓는 한 자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루가 수술을 받기 전의 루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가는 장애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부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둠의 속도>는 기술 발전에 대해,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대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 등에 대해 굵직굵직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장애인을 감동을 주는 인물로 그려내는 드라마틱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장애와 과학기술에 대해 차분히 오래도록 곱십을 수 있는 독서 경험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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