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nnouncement board

  • HOME
  • 매거진

[뉴스레터 10] 대신 읽어드립니다 - 어둠의 속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조회 17회 작성일 25-03-10 11:41

본문

64598_1648949013.jpg
64598_1648949022.jpg
  

읽고는 싶지만 너무 두껍거나 어려울 것 같아서 엄두가 안 나는 책들을 먼저 읽고 이야기해드리는 ‘대신 읽어드립니다’ 코너입니다. 이번에 읽어볼 책은 엘리자베스 문의 장편 SF 소설 <어둠의 속도>(정소연 옮김, 푸른숲, 2021)입니다. 524쪽...이에요. 


글쓴이 신수진

어린이책 번역가,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 어쩌다 보니 제주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64598_1651909727.jpg
 (...) 자폐아를 키우는 다른 부모들에게,
그들도 다름에서 기쁨을 찾길 바라며
- 엘리자베스 문
 
????

  <어둠의 속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폐인의 시선'으로 삶의 정상성에 대해 질문하는 SF 소설입니다. 작가 엘리자베스 문(Elizabeth Moon)은 1945년생으로, 자폐가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03년에 씌어졌어요.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처음 출간되었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입니다. 임신 중 자폐가 진단되면 영유아기 때 뇌수술로 자폐를 치료할 수 있게 된 시대지요. 더 이상 자폐인이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주인공 루 애런데일은 그러한 사전 치료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 성인이 된 마지막 자폐인 세대 인물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루는 그룹홈을 거쳐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습니다. 루의 직업은 연구원인데요, 전원 자폐인으로 구성된 한 거대기업의 특수분과에서 근무 중입니다. 루와 동료 자폐인 직원들은 '패턴'을 발견해내는 천재적인 수학 능력을 통해 회사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특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심신 안정에 필요한 전용 주차장, 전용 체육관, 전용 음악시설 같은 특별 복지혜택을 제공받고 있어요. 책 표지에서 보이듯 루의 책상에는 수많은 선풍기와 알록달록한 바람개비들이 돌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는 루의 심신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물론 다른 자폐인 직원들도 각자 좋아하는 것들(예를 들어 트램펄린 같은 운동기구)을 갖추어 놓고 일하고 있어요. 


  나는 읽기를 멈추고 그 문장을 빤히 응시한다. "본래, 생리적인 기능을 제외하자면, 인간의 뇌는 패턴을 분석하고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숨이 가슴에서 걸린다. 몸이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진다.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내가 하는 일이 인간의 뇌가 가진 본래적인 기능이라면, 나는 기형이 아니다. 정상이다. (261쪽)


  하지만 이런 안정적인 기반은 크렌쇼라는 새로운 상사가 부임하면서 크게 흔들립니다. 크렌쇼는 자폐인들만을 위한 특혜와 값비싼 혜택이 왜 필요하냐며 팀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는데요, 사내 연구에서 '정상화 수술'이 새로 개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폐인들이 '정상'이 된다면 특별 복지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없겠죠. 크렌쇼는 자폐인 직원들에게 정상화 수술을 강요합니다. 수술을 받더라도 일자리는 계속 유지시켜줄 거라고 하면서요.  

64598_1651917665.jpg
   르네 마그리트, 데칼코마니(1966) 

  자폐인 직원들은 큰 혼란과 고민에 빠집니다. 자폐가 사라진 내가 과연 나일까. 루 애렌데일 또한 마찬가지 고민을 합니다. 30대, 40대가 될 때까지 쌓아온 나의 모든 지식과 경험이 뇌수술로 인해 제거된 내가 나일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뇌수술의 안전성 또한 보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캐머런이 말한다. "나는 결혼하고 싶어. 아이들을 갖고 싶어.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집에 살며 평범한 대중교통을 타고 여생을 정상인으로 살아가고 싶어."  

  "네가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더라도?" 에릭이 묻는다.

  "나는 당연히 지금과 같은 사람일 거야. 그저 정상인이 될 뿐이지."

  과연 그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정상이 아닌 점들을 생각해보면, 정상이면서 지금과 같은 사람인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이번 일의 핵심은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우리를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것이다. 틀림없이, 여기에는 성격과 자아도 포함될 터이다. (385쪽)


  "나 자신이 누구인가는 저에게 중요합니다." 내가 말한다.

  "그러니까, 자폐증을 앓는 게 좋다고요?" 의사의 목소리에 꾸중하는 듯한 어조가 섞인다. 그는 나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 만약 내가 자폐인임이 어떤 느낌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면, 서른다섯 해 동안 내가 쌓아올린 것들을 모두 잃게 되리라.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 내 경험을, 그저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듯이 기억하고 싶지 않다. (394~395쪽)


  이 작품이 좋았던 것은 과학기술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의, 매끄럽고 흠집없는 도구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둠의 속도>는 자폐인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1959년에 출간되었던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이 두 작품이 과학기술을 보는 관점은 시대가 변해온 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앨저넌에게 꽃을>은 수술을 받으면 뚝딱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분위기에서 씌어진 작품이고, 그에 반해 <어둠의 속도>는 그 어떠한 치료법의 개발과 과학의 발전에도 부작용이 없을 수 없으며 치료법을 덜 윤리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자체가 장애를 없애고 구원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것 같아요.  

64598_1651915128.jpg

이미지 출처 https://www.aweinautism.org/about-us/  


  한편 루의 펜싱 클럽 친구인 돈(Don)은 루를 시기한 나머지(펜싱 클럽의 한 여성이 루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질투해요) 루를 스토킹하면서 일상을 서서히 망가뜨리고 마침내는 자동차 폭탄 테러를 모의합니다. 새로 온 상사 크렌쇼와 마찬가지로, 돈은 루에게 노골적으로 "병*" "동물원에나 처박혀 지내야 할 존재"라고 욕하고, 약자들에게 쏟아붓는 온갖 사회 지원 때문에 자기 같은 인재가 밑바닥 일을 하고 사회가 불경기로 빠져든다고 말합니다. (이 말, 왜 이렇게 익숙하죠?)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수술을 받을지 말지가 더욱 급박한 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돈이 범인이라는 걸 애시당초부터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는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돈은 자신의 친구이고, 친구란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런 식으로 자폐인이 사고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소위 정상인들에게 분명히 보이는 사건들이 루에게는 미스터리일 때가 많으며, 정상인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루에게는 너무나 명백히 보이는 일상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은 채로 뚝뚝 끊어지는 듯한 서술방식이 낯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루의 시각에 서서히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때 같을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내요. 괜찮아요. 잘 자요, 부탁합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아뇨, 사양할게요, 당장은 아니에요. 교통 법규를 지킨다. 규칙을 따른다. 아파트에 평범한 가구를 놓고, 내 별난 음악은 아주 조용히 틀거나 헤드폰으로 듣는다. 그래도 부족하다. 이렇게도 안간힘을 쓰는데도, 진짜 사람들은 내가 변화하기를, 그들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내 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63쪽)

  

  책의 제목은 <어둠의 속도>였죠. 많은 사람들은 밝은 상태, 빛을 기본값으로 봅니다. 어둠이란 그저 빛이 없는 상태인 거죠. 하지만 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이란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다, 어쩌면 어둠은 빛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어둠은 빛보다 항상 먼저 있다고 말이죠. 이 말은 엘리자베스 문 작가의 자폐인 아들이 했던 질문에서 왔다고 해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자폐'와 '정상'은 전혀 동떨어진 대척점이 아니라 스펙트럼 상에 있는 두 점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자폐의 특성을 정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을 갖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자폐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술이 좋았어요.  

  자, 그래서 루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국 루는 수술을 받는 선택을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위험을 감수하기를, 새로운 친구를 찾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나온 루는 동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술을 끝까지 받지 않은 동료도 있어요.  

  에필로그에서 루는 여전히 밖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죠. 대학교육을 받고 천문학자가 된 루는 빛을 쫓는 한 자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루가 수술을 받기 전의 루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가는 장애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부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둠의 속도>는 기술 발전에 대해,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대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 등에 대해 굵직굵직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장애인을 감동을 주는 인물로 그려내는 드라마틱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장애와 과학기술에 대해 차분히 오래도록 곱십을 수 있는 독서 경험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별난고양이꿈밭 사회적협동조합 대표자 : 박정경 사업자등록번호 : 153-82-00426 대표전화 : 070-8900-9667 FAX : 070-8900-9666 E-Mail : scatdream@naver.com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천수로 52 2층 (오성빌딩)
Copyright © 2021 별난고양이꿈밭. All rights reserved.Designed By ADS&SO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