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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05] 대신 읽어드립니다 -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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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24회 작성일 25-03-0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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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는 싶지만 너무 두껍거나 어려울 것 같아서 엄두가 안 나는 책들을 먼저 읽고 이야기해드리는 ‘대신 읽어드립니다’ 코너를 시작합니다. 저는 어린이책 번역가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 그리고 사회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신수진입니다.

첫 번째 책으로는 864쪽짜리 ‘벽돌’책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존 돈반캐런 저커강병철 옮김꿈꿀자유, 2021)를 골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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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번역자이자 '꿈꿀자유' 출판사 발행인이기도 한 강병철 대표는 이 책으로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상을 받았습니다.  강 대표는 2000년대 중반 제주도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했는데, 병원을 접고 책을 만들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 합니다. 큰아이가 정신질환을 진단받았는데 국내에서는 환자와 가족이 믿고 따를 만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죠. 이 책은 1년 4개월에 걸쳐서,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읽으면서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 덕에 아주 쉽고 유려한 문장으로 만날 수 있었어요.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인터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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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에 어머니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다리가 불편해지면서 조금씩 절뚝거리며 걷는 자신을 도통 못 견뎌하시다가 내린 결정이었어요. 집에 친구분들이 놀러왔을 때도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면서 소파에 꼼짝도 않고 앉아 계시기만 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술이라는 것이 무슨 기계 부품 갈아끼우는 일은 아니니 당연히 회복과 재활에 수개월이 걸릴 텐데, 어머니는 자기 힘으로 거동을 못하는 현실 또한 한동안 잘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그러면서도 간병인이 필요없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식구들이 애를 먹었습니다. 하는 일도 없는데 뭐 하러 사람을 쓰냐는 거예요. 돌봄 노동에 평생을 바쳐온 70대 후반 여성도 타인의 돌봄 노동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자식들의 간병비 부담을 생각해서 그러셨겠지만요.

“엄마, 사람을 당장의 쓸모로만 판단하면 우리는 전부 다 회사에서 진즉에 쫓겨났어.”

형제 중에 가장 고액 연봉을 받는 동생이 단호하게 말하자 어머니는 ‘하는 일 없다’는 말을 더이상은 안 하셨는데, 그 뒤로도 ‘도수치료 그거 별거 아닌데 돈 아깝다’고 하시질 않나,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려다 넘어져서 큰일 날 뻔하는 등 조마조마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현실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능력 있는 사람’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했고 자식들도 그러길 바랐지만, 저는 스무 살 이후로 그 길에서 멀리 이탈하고 말았어요. 곳곳에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 그만큼 다양한 행복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 일이 늘 흥미로웠고, 자신의 가능성을 긍정하면서도 취약하고 못난 부분 또한 쿨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이 서로 염려하고 돌볼 수 있을 때 삶이 더 풍요로울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들보다는 어딘지 삐딱하고 모난 친구들이 항상 더 좋았고요.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소개에 앞서서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이 책이 비장애인인 저와도 분명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어머니한테서 "이상한” 딸로 걱정을 사고 있지만, 조카들에게는 요리와 실없는 소리를 잘하는 명랑한 이모이고, 그림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지한 연구자이자 선생이기도 하고, 대학원에서는 어벙한 학생입니다. 단 한 가지 특성만으로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장애인, 자폐인이라는 규정은 한 사람의 일부분만을 보여줄 따름이죠. ‘자폐의 역사’가 흥미로운 것은 “어딘지 다른 사람”인 자폐인의 특성에 대해 탐구해온 역사가 인간 존재를 계속 새롭게 발견한 역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40년대에 미국의 소아정신과 전문의 레오 카너(Leo Kanner)가 자폐를 처음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자폐인은 인류 역사에 계속 존재해왔을 것입니다. 자폐증은 언제나 인간 조건의 일부였으며 수십 년간 정의가 조금씩 조정되었을 뿐(39장 사회적 비상사태')인지도 모릅니다. 아스퍼거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일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동안 혼자 바위를 깎아내는 데 몰두했던 아스피(Aspie)가 인류 최초로 돌로 된 창을 발명했을 것(44장 당사자의 목소리)이라며 자폐인의 존재를 긍정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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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템플 그랜딘에 대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이 책부터 보시면 좋아요! 

그저 “어딘지 다른” 채로 공동체 속에 섞여 살아왔던 자폐인들은 20세기 초 우생학에 대한 열광 속에서 ‘사회악’으로 취급되며 문제시되었습니다. “결함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국가 자원의 낭비이며, 한 집안에서도 애정이 필요한 다른 자녀를 돌보는 편이 훨씬 나으니 장애가 있는 자녀는 하루빨리 수용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였죠. 그러나 당시 레오 카너는 『정신의학저널』을 통해 이례적으로 정신장애 어린이를 대변하며 기존 의학계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사회가 가장 약한 사람을 옹호하는 일을 축소시킨다면 결국 사회 자체가 왜소화되고 말 것”이라면서요. 맞아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조직과 사회는 ‘고인 물’이죠.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레오 카너는 1942년, 도널드 트리플렛이라는 1935년생 어린이와 그 비슷한 몇 명을 더 진찰한 후 처음으로 ‘정서적 접촉에 대한 자폐적 장애’라는 명명을 했습니다. 도널드는 부모가 네 살 때 시설로 보냈다가 결국 다시 데리고 나온 아이였어요. 특히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온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겠다고 결심했고, 이 꼼꼼한 기록을 가지고 1938년에 레오 카너를 찾아갑니다. 부모가 원했던 것은 아들의 ‘병명’이 과연 무엇인가였지만,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였죠. ‘자폐’가 20세기 중반에야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지만, 인류는 그때까지 ‘자폐’를 볼 수 있는 관점을 갖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폐의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영향 아래서 모든 것이 엄마 탓이라는 여성혐오적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의사도 아니고 심리학자도 아니었던 브루노 베텔하임(옛이야기의 매력이라는 책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여기서 이런 괴상한 활약상을 볼 줄이야!)을 위시하여 언론은 냉담한 “냉장고 엄마”라는 선정적인 용어를 퍼뜨렸습니다. 1960년대 들어서 자폐는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타고나는 것임을 증명하는 흐름이 생기고, 1970년대에는 쌍둥이 연구 등을 통해 엄마를 비난하는 문화가 사그라들지만, 글쎄요, 자녀의 장애나 질병에 대해 부모와 가족, 특히 어머니를 비난하는 문화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딘지 다른 사람”들의 생존권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이어 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한 투쟁도 시작됩니다. 고통스런 자극을 주면서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치료와 작업치료를 병행하고 그 과정에 부모도 함께한다는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장애 어린이의 교육을 공공이 책임지는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자폐인의 부모들은 항상 중요한 흐름을 이끌어갔는데요, 미국에서는 자폐증의 치료, 나아가 완치를 추구하는 흐름이 강했고 영국의 연구자들은 치료보다 자폐증의 본질이 무엇이지 설명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폐증은 인간 마음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하는 큰 질문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거죠. 1963년, 헤르멜린과 오코너라는 연구자들은 5년간의 실험 끝에 많은 자폐 어린이가 보고 듣는 것보다 촉감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자폐증에 신경학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부모들의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비장애 형제들이나 공동체가 이루어낸 크고 작은 움직임도 간간이 소개됩니다. 장애인에게 학교 교육이 제공되고 수용시설이 거의 문을 닫을 때인 1980년대까지도 “종신재소자”로 여전히 시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4년생인 아치 캐스토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80대 후반이 된 아치 캐스토의 누나 해리엇 캐스토는 자폐증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남동생을 떠올립니다. 한 번도 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자폐일 가능성이 충분한 것 같았죠. 할머니가 되어서야 운전을 하게 된 해리엇은 동생을 주기적으로 만나러 가면서 동생과의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치는 누나의 애정에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지만, 몇 년이 흐르자 마침내 누나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치가 그저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누나는 바위 같은 침묵 저편에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동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누나는 74세가 된 동생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가 그룹홈으로 옮깁니다. 다들 아치가 금세 얼마 못 견디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장난감을 가지게 된 아치는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목공 일을 배우고, 81세에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죠(14장 "세상의 무관심이란 벽 뒤에서").

그런가 하면, 1971년 장애아동들이 감금된 소위 ‘주립학교’는 전혀 학교가 아니라는 점을 호소하며 장애인들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모든 미국인의 동등한 권리’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아낸 변호사 톰 길홀 또한 동생을 평생 시설에 두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던 비장애 형제였습니다(15장 '교육받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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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자폐인을 그린 영화 <레인맨>(1988). 더스틴 호프만은 피터 거스리라는 20대 자폐인 청년과 몇 개월간 붙어 지내면서 관찰하고 연기했습니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사랑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그렸던 그간의 자폐증 서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부모들은 여전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지만, 모든 사람이 적어도 대충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38장, 자폐증 수면 위로 떠오르다). 

가족 외에는 옹호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고, “더이상 귀엽지도 않은” 자폐 성인들을 위해 설립한 덴마크의 한 소프트웨어 테스트 서비스 제공 회사 이야기라든가, 매일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노선 버스를 타고 다니던 자폐인에게 낯선 사람이 시비를 걸자 “얘가 왜 그러냐구? 얘는 자폐인이요. 이제 당신들이 왜 그러는지 말해봐요.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가든지.” 하고 쏘아붙여준 사람과 그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준 뉴저지의 ‘버스 공동체’ 이야기가 실린 ‘후기’도 가슴 뭉클했습니다.

이 책은 엄청 두꺼운 것은 사실이지만 학술적이거나 어려운 책은 아니에요. 저자 두 사람이 방송인, 저널리스트라서 그런지, 쉬운 언어로 삶의 기쁨과 슬픔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한번 손에 잡으면 술술 넘어갔습니다.


자폐에 대해서는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신경다양성의 관점이 있는가 하면, 자폐증이 얼마나 심한 장애일 수 있는지, 삶을 누릴 기회를 얼마나 많이 박탈하는지를 이야기하며 이 모든 것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또 다른 방식”일 수 없고 아픈 것, 질병이라고 말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자폐증은 애초에 규정하기 힘들고,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45장 신경다양성’). 하지만 장애인 혐오의 눈살 찌푸려지는 역사와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을 밀고 나갔던 힘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앞서 길을 만들어온 자폐인의 부모, 가족, 그리고 자폐인 당사자들의 힘을 바탕으로 “어딘지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점점 더 확장해나가게 될 거예요. 누군가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겠지만, 약자에 대한 혐오 외에 세상을 바꿀 비전이라곤 없는 세력은... 에휴, 그저 딱할 뿐이죠.

이 세상 그 누구도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완벽히 독립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딘지 다른 사람”을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옹호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삶 또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일과 맞닿아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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