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어딘지 다른” 채로 공동체 속에 섞여 살아왔던 자폐인들은 20세기 초 우생학에 대한 열광 속에서 ‘사회악’으로 취급되며 문제시되었습니다. “결함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국가 자원의 낭비이며, 한 집안에서도 애정이 필요한 다른 자녀를 돌보는 편이 훨씬 나으니 장애가 있는 자녀는 하루빨리 수용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였죠. 그러나 당시 레오 카너는 『정신의학저널』을 통해 이례적으로 정신장애 어린이를 대변하며 기존 의학계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사회가 가장 약한 사람을 옹호하는 일을 축소시킨다면 결국 사회 자체가 왜소화되고 말 것”이라면서요. 맞아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조직과 사회는 ‘고인 물’이죠.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레오 카너는 1942년, 도널드 트리플렛이라는 1935년생 어린이와 그 비슷한 몇 명을 더 진찰한 후 처음으로 ‘정서적 접촉에 대한 자폐적 장애’라는 명명을 했습니다. 도널드는 부모가 네 살 때 시설로 보냈다가 결국 다시 데리고 나온 아이였어요. 특히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온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겠다고 결심했고, 이 꼼꼼한 기록을 가지고 1938년에 레오 카너를 찾아갑니다. 부모가 원했던 것은 아들의 ‘병명’이 과연 무엇인가였지만,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였죠. ‘자폐’가 20세기 중반에야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지만, 인류는 그때까지 ‘자폐’를 볼 수 있는 관점을 갖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폐의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영향 아래서 모든 것이 엄마 탓이라는 여성혐오적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의사도 아니고 심리학자도 아니었던 브루노 베텔하임(『옛이야기의 매력』이라는 책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괴상한 활약상을 볼 줄이야!)을 위시하여 언론은 냉담한 “냉장고 엄마”라는 선정적인 용어를 퍼뜨렸습니다. 1960년대 들어서 자폐는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타고나는 것임을 증명하는 흐름이 생기고, 1970년대에는 쌍둥이 연구 등을 통해 엄마를 비난하는 문화가 사그라들지만, 글쎄요, 자녀의 장애나 질병에 대해 부모와 가족, 특히 어머니를 비난하는 문화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딘지 다른 사람”들의 생존권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이어 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한 투쟁도 시작됩니다. 고통스런 자극을 주면서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치료와 작업치료를 병행하고 그 과정에 부모도 함께한다는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장애 어린이의 교육을 공공이 책임지는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자폐인의 부모들은 항상 중요한 흐름을 이끌어갔는데요, 미국에서는 자폐증의 치료, 나아가 완치를 추구하는 흐름이 강했고 영국의 연구자들은 치료보다 자폐증의 본질이 무엇이지 설명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폐증은 인간 마음의 일반적인 작동 방식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하는 큰 질문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거죠. 1963년, 헤르멜린과 오코너라는 연구자들은 5년간의 실험 끝에 많은 자폐 어린이가 보고 듣는 것보다 촉감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자폐증에 신경학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부모들의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비장애 형제들이나 공동체가 이루어낸 크고 작은 움직임도 간간이 소개됩니다. 장애인에게 학교 교육이 제공되고 수용시설이 거의 문을 닫을 때인 1980년대까지도 “종신재소자”로 여전히 시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4년생인 아치 캐스토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80대 후반이 된 아치 캐스토의 누나 해리엇 캐스토는 자폐증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남동생을 떠올립니다. 한 번도 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자폐일 가능성이 충분한 것 같았죠. 할머니가 되어서야 운전을 하게 된 해리엇은 동생을 주기적으로 만나러 가면서 동생과의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치는 누나의 애정에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지만, 몇 년이 흐르자 마침내 누나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치가 그저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누나는 바위 같은 침묵 저편에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동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누나는 74세가 된 동생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가 그룹홈으로 옮깁니다. 다들 아치가 금세 얼마 못 견디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장난감을 가지게 된 아치는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목공 일을 배우고, 81세에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죠(14장 "세상의 무관심이란 벽 뒤에서").
그런가 하면, 1971년 장애아동들이 감금된 소위 ‘주립학교’는 전혀 학교가 아니라는 점을 호소하며 장애인들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모든 미국인의 동등한 권리’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아낸 변호사 톰 길홀 또한 동생을 평생 시설에 두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던 비장애 형제였습니다(15장 '교육받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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